2014/09/22

Bouldering shoes 암벽등반 전문화 장만했다

하루 하루.
저녁시간이 다가올수록 여러가지 생각과 걱정 등등 일 이상의 감정을 소모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으로 인해 효율없이 연구실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기도 한다.
이러한 나를 연구실을 박차고 나서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다른 활동이다.

최근 내가 즐기는 여러가지 활동 중 하나는 실내 암벽등반!
암벽등반은 운좋게 시작할 수 있었던 셈인데, 체육관이 우리집에서 매우 가깝게 있고, 연구소에서 정기적으로 함께 가는 사람들이 있는 덕분이다.

로프를 갖고 하는 것을 이전에 해보면서
파트너가 있어야 한다는 점 때문에 거리감이 생겼었다.
그러나 로프를 갖고 하지 않더라도, 특별한 장비없이 수 미터만 손과 발을 이용해 오르는 Bouldering이라는 것을 알게되면서 암벽등반에 곧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 혼자서도 할 수 있구나!라는 깨달음

지난 겨울부터 시작했으니, 곧 일 년이 되어 가는 셈이다.
실내 암벽등반 시설이 있는 곳이라면
평생의 취미가 될 것이라는 판단을 하게 된 순간부터
내가 가장 갖고 싶어진 것은 전문 신발이였고, 드디어 장만했다!

음하하하하~

매우 꽉 조여지는 불편함에 이거 정말 내 사이즈가 맞아?!?할 정도로 발이 아픈 것이 
'맞는'사이즈라 할 수 있는 특이한 신발이다.
발가락이 신발을 꽉 채워서, 돌이 발의 한 귀퉁에만이라도 닿으면 지탱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발 밑면이 굴곡이 있으면 가격이 오르는.... (다르게 말하면 평평한 곳에서 걷기에는 불편하다)
지상의 편함과는 거리가 있는 암벽등반 전문화.

나는 이 불편한 녀석을 아침저녁으로 매일 신어서 내 발에 익숙해지게 만들기로 작정했다.
다음 암벽등반부터는 이녀석과 함께라니, 벌써 즐거워 진다.

2014/09/18

행성과학을 하는 사람 2 - 그런데도, 하는 이유

1. 업무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으므로 자신이 효율적으로 일한다면 다른 취미생활도 즐길 수 있다. (능력제).
참고로, 야근에 대해 각 국에서의 시선은 좀 다르다. 야근을 일 열심히 하는 사람으로 우리나라에서 본다면, 유럽에서는 비효율적인 사람으로 보게 될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미국은 왠지.. 우리나라와 비슷할 것 같다??
2. 자신의 능력에 대한 어필능력을 기르게 된다. 내가 아는 것을 파는 셈이니까.
3. 학회장에 있는 각국의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점차 적어진다.
4. 아마, 모든 세부적인 직장들이 그러하듯, 행성과학 역시 정말 다양한 분야들이 존재한다. 아마 학부시절, 심지어는 박사과정을 하던 동안에도 잘 모르던 분야의 존재를 깨닫는다.
5. 아이디어를 현실화시킨다. 아이디어와 능력만 있다면, 그리고 더불어 협력자까지 있다면, 시작해볼 수 있다. 사실, 아이디어는 단순한 연구주제부터, 큰 수십년 프로젝트에도 해당한다. 소행성 착륙선이나 로봇을 보내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니까.
그만큼 본인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커지게 된다.
6. 다른 직업에 비해, 대중적으로 쉽게 관심을 받을 수 있는 직장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신기해하는 분야라서 인 듯 (우리나라는 제외- 발사체 개발과 첫 우주인은 참 많이 비판받았었지).
7. 직장을 옮겨다녀서 그렇지, 어떻게든 직장은 구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있다. 사실, 그래서 걱정하는 것 자체는 '내가 원하는 직장'일 것인가-인 것이지, 직장을 못찾을까봐는 아니다. (나만 천하태평인건가?)
8. 세계를 누리리라-라는 꿈이 있고, 새로운 생활이 힘들어도 즐길 수 있다면, 이 떠돌이 생활, 잘 맞을 수 있다.
9. 내가 쓴 논문이, 내가 죽은 후에도 두고두고 오래 쓰일 수도 있다. 행성탐사선은 많이 비싸서 그리 자주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구에서의 관측은 적절한 조건에 맞아야 하며, 비싼 관측기기의 사용허가가 쉽게 나오지 않다. 그래서 오래된 논문들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 물론, 그만큼 좋은 내용을 만들어야 하겠지.
10. 9번과 같은 이유로 인해, 무엇인가를 '최초'로 분석해내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흥분감이 있다. 아마도, 이 일을 하는 근본적인 원동력인지도 모른다. (주의. 관련 논문들을 잘 살펴봐야 한다.)

2014/09/17

행성과학을 하는 사람 1 - 불만

1. 돈 크게 벌 생각 일찍 접으면, 상관없다.
생각해보면, 나는 초등학생 때, '과학자'를 할거야라고 말하던 때부터, 이미 돈은 살만큼만 벌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허나, 솔직히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능력/인맥/운의 삼박자이 맞는 이는 매우 풍요로운 생활도 할 수 있다. 다만, 세계적으로 이런 자리는 몇 없으며, 거기에다 그만큼 일하는 시간은 늘어나므로 돈 때문보다는 명예욕에 사람들은 높은 자리를 추구하게 된다.)
2. 장기 직장이 거의 없다. 단기간 계약직. 항상 다음 직장 혹은 다음 연구 프로포절을 찾아야 한다. 욕나온다.
3. '휴가'라 해도 정말 일을 놓지 못한다. (놓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1번같이 높은 지위에 오를수록, 휴일에도 일해야 뭔가 돌아간다. 아니면, 그냥 삽질하는 일이 있는 경우에도 휴가에 쉬지 못하고 일하게 되거나.)
4. 영어를 잘해야 하는데, 특히, 논리적인 영작과 영어 토론을 해야 한다.
5. 갑자기, 한 노장이 일어나 '그게 아니야!', '나는 못 믿어! 잘 못 된 연구야!'라고 말하고 보는 경우들도 있다. 나는 그런 말을 들으면 큰 상실감에 시달리게 되던데. 더군다나 이런 공격을 학회장에서 공개적으로 받는 경우도 여러차례 봤다. 나는 과연 언제쯤 슬기롭게 대처할수 있을까? 감정적인 부분을 다치지 않고 '사실'에 대한 것만 걸러서 듣는 법을 배워야 할텐데.
6. 보스의 원조에 크게 좌우된다.
7. 이 분야는 인맥이 최고다.
8. 해외 출장은 여행이 아니다. 일하러 이틀 비행기타고 왔다갔다하고, 시차 적응에 수 일을 날려먹으나, 그러한 시간들은 따로 주어지지 않는다.
9. 100% 능력제이자, 99.9%의 행운제이기도 하다. 능력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변수에 따라 천재가 둔재가 되어 퇴화될수도 있다. 무능한 상사/오류자료처리/뜻밖의 사건(예, 준비한 우주 탐사선의 실패) 등등. 수많은 이들이 '운이 나빠' 제실력 못키우고 나자빠진다. 만약, 그러한 상실감에 실질적인 조언을 주는 멘토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가장 큰 행운! 멘토 있는 사람은, 복 받은 거다.
10. 언제나 불확실성과 싸워야 한다. 그래서 경력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너무 많은 것들이 불확실하다. 무엇을 파고 들지, 포기할지 - 실현 가능성을 볼 줄 알아야 한다.
11. '자금'을 따야한다. 어떻게 하는지 봐두고 싶다.

연구의 단계

너무 많은 것들에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겠다고
손을 놓는 것 보다는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것 부터,
그리고 현재 하고 있던 삽질부터
조심스럽게 살펴보는 거다.

쉽게 무엇이 보이지 않는다면
당장 결론을 내려려 하지않아도 될거다.
그만큼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니까.

보이는 것 까지.
내가 분명하게 '그렇다' 할 수 있는 것과, '그럴지도 모른다'라고 할 수 있는 것들
그리고 모든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들도 노트해두며 정리하자.

이 모든 것이 '자료의 오류'가 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
내가 한 모든 일들이 '일련의 실수'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겠니.
나는 과학을 하는 거다.만들어가는 과정이 타당한지 언제나 점검하고,
자료는 여러가지 것들을 살피고 또 살펴서 오류들을 잡아내고,

내가 보는 결과가 설명이 가능한 현상인지 찾아내는 거다.

나는 내가 가진 자료를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내가 하는 일이 '자료의 오류'를 확인 하는 것일지, 혹은 진짜 현상일지 모르겠다면,
규칙성 혹은 오류 가능성을 체크해야 한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모두 자료의 불확실성 속에서 많이 힘들어하는 것은 똑같은 이치일 것이다.
나만 특별하게 힘든일 하는 것이 아니야.






하지만....
아무래 그래도...
자료의 오류 가능성은 최대한 적었으면 좋겠다.
아무리 내가 쓰고 싶은 자료라해도, 믿고 쓸 자료인지 확인하고 써야한다.
그것을 판단하는 것이 '경험치' 인 것인가...!

2014/09/16

도쿄도에서 가장 높은 산, Kumotoriyama (쿠모토리산, 2017 m)

뒤늦은 업데이트.
7월 마지막 휴일에 다녀왔었던 쿠모토리 산행기이다.

이 날의 산행은 나의 여러차례에 걸친 산행에서도 꽤 색다른 경험이라 할 수 있다.
1박 2일의 산행을 하면서 일본의 산장에 처음으로 숙박을 해보았으니.
최근 홀로 산행을 종종 하다보니, 나처럼 여자건 남자건 혼자 다니는 사람들이 꽤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예를 들자면, 이 날 밤 묶은 산장에서 한 방에 머무른 여자들 4명(나 포함)이 모두 솔로 산행자였다!

나에게 산행을 즐기는 이유는 그다지 특별하지않다.
평소 시달리던 일들이나 걱정들에서 멀리 떨어져서
자신의 체력적인 한계에 도전하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 해소가 된다는 점이니까.

그러나 혼자하는 산행은 사실 일본에 오기 전까지는 해본적이 없었다.
왠지 위험할것 같았다고나 할까?
산은 친구와 가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아는 지인이 없는 상황에서 누구에게 같이 가자고 할 거란 말인가? 하하하하
그냥 혼자라도 가보자-고 시작해보니,
의외의 수확으로 큰 깨달음이 있었다.

혼자 하는 산행은 신경 쓸 일행이 없다보니, 스트레스가 적을 뿐더러,
스스로에게 집중을 하게 되는 맛이 있다.
무념무상으로 조용히 길을 걷게 되는 그것은 나에게 모처럼의 평화로운 시간이기도 하다.

나는 이렇다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혼자 다니는 산행을 즐기기 시작한 것일까...?
안타깝지만, 나는 산장의 여자 솔로 산행자들에게 물어볼수가 없었다.
아직 일어가 유창하지 않아서 이런 대화까지는 어렵기 때문이지;;;ㅎㅎ뭐, 그래도 간단한 대화는 통했으니 그정도로 만족스러웠다.

(오르는 길은 날씨가 변덕스러웠다.
강렬한 햇빝아래 안개가 자욱해지더니...)

(비가 다소곳하게 내려서 더위없이 산행을 하게 되었다.)

(자, 여기가 산 정상!
원래 날씨가 좋다면 이 팻말 뒷편으로 후지산이 보인다.)

(안개덕분에 산장으로 가는 길은 신비스럽기 그지없다.)

산장에서의 하룻밤은 꽤 편안했다.
관리인이 있으며 숙식을 해결할수 있어서
내가 굳이 침낭과 식사용품을 가져갈 필요가 없다.
물론, 숙식요금만큼 돈을 내야 하고,
음식은 매우 조촐하다.
그러나 가벼운 가방만 들고 산행을 할 수 있으면,
따뜻하게 방금한 밥과 국을 편하게 먹을 수 있기에
나는 망설임없이 숙식요금을 선택했다.

그러나-
단점은 기상시간이 정해져 있다는 점이였다.
아, 놔....
4시에 점등하더니,
5시 좀 넘자, 아침먹으라고 부른다.
거의 비몽사몽으로 아침을 먹고 출발하던 때가 6시 반이였던가...?

(하산 길, 안개는 더욱 짙어졌다)

(내려오는 길에 본 바로 전에 지나간 듯한 동물의 발자국.
선명하게 다른 사람들의 발자국 위로 흔적이 남아있다.
산돼지일까, 사슴일까 잘 알지 못했는데,
후에, 야생 사슴이었을거라고 짐작하게 된다.
돌아가는 버스 정거장에서 만난 다른 산행자가 신나서 야생사슴 동영상을 보여준 것이다.
직접 못 봐서 아쉬워도, 분명 내 주변에도 어디에선가 있었겠지!)

이 산행.. 나는 꽤 마음에 들었다.
도쿄에서 가까운 거리인데도 이런 산이 있다니.

2014/09/13

라면에 대한 기억

나의 기억속- 라면은 그다지 큰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다.
라면을 가끔씩이나마 끓여먹던 것은 초등학교/중학교 시절에 불과했다.
맞벌이 부부이셨던 부모님과 고학년이였던 언니가 집에 없어서 혼자 밥을 해먹어야 하는데 마땅히 먹을 것이 없으면 라면에 손이 갔었다.

언제부턴가, 라면은 나에게 좀 멀리해야 할 식품으로 분류되기 시작했다.
5분만에 만들게 되는 빠른 속도는 정성이 없어 보였고,탄수화물과 염분 과다 섭취는 건강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다는 의미로 다가왔던 것이다.
허나, 바로 위의 말들은 나의 라면에 대한 거리감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핑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솔직 단순 직접적인 이유는 바로
라면은 "아버지가 수시로 만들어먹던, 좋아하시던 식품"이였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오랜 시간, 건강이 많이 좋지 않으셨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겠다고 운동을 안하시던 아버지.
 그러한 몸상태로 종종 라면을 끓여드셨다.
먹을 것도 없고, 라면이 가장 좋다나...?
그러한 아버지는 나에게 자기자신을 포기한 듯 싶어보였다.
고혈압으로 고생하면서 왜 고염분으로 유명한 라면을 좋아하는가?
신선한 야채, 운동을 멀리한 채, 왜 그렇게 자신에게 안좋은 음식을 제공하며
자신의 건강을 헤치느냔말이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이어
내 건강은 스스로 챙긴다는 의무감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불량 먹거리인 라면은 가장 먼저 퇴출마땅한 식품으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라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대학 졸업후에도,
그리고 독일에서도, 일본에서도 이어져나가다 보니,
나는 라면을 멀리할 뿐이였다.

그런데 라면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특별한 사랑은 모두가 라면을 좋아할 것이라고 믿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한국의 친구와 지인,
그리고 심지어는 나의 가족들까지도
나에게 보내는 소포나 방문 기념 선물에는 항상 라면이 끼여있었다.
고맙다고 받기는 했으나, 처치방법이 없어서 그냥 쟁여두다가 일 년 넘게 지나도록 안먹고 버리게 되곤 했다 (라면 유통기한 의외로 짧아서 반년정도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것은 일본에서의 생활에서도 이어져서
라면은 그다지 나에게 반갑지 않은 선물임에도 불구하고 종종 받게 되어 처치곤란이 되곤 한다.

그런데 오늘은 매우 오래간만에
맛있는 라면이 먹고 싶어서 끓여먹게 되었다.
봉지 뒤의 설명에 적힌 정량의 물에
송송 썰은 파도 넣고
적당한 시간을 끓여 내니,
쫄깃한 식감에 뜨거워도 꼭꼭 씹어 먹는 맛이 생긴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어머니가 손수 담가주신 김치를 꺼내서 얹어먹으면
좋아하지 않는 그 무엇도 다 맛있는 음식으로 변해버린다.

별다른 노력없이 쉽게 만들어
휘리릭 먹어버리게 되는 라면.
강한 분말스프의 맛...
이 자극적인 맛을 아버지는 좋아하셨던 것일까?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를 이해하지는 못하겠지.
왜냐면 아버지는 '가장 빨리 라면을 끓이는 방법'을 나에게 전수해주시곤
이제 더이상 이야기를 나눌수 없게 되었다.

아버지의 기일인 오늘.
나는 라면을 먹으며 아버지를 기리는 셈이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의 제사음식준비로 바쁠 텐데
오늘 저녁에는 집에 전화라도 해야지.


2014/09/11

다이나믹하고도 쉴 틈 없었던 한 주의 여름 휴가

60대이신 어머니,
30대인 나,
그리고 6세인 조카.

이 독특한 조합의 일본 여행은
심상치 않은 조화만큼이나
쉽게 풀리지 않으면서도
이상한 조화(?)를 이루게 된 독특한 인생경험의 시간이 되었다.

장담하건데,
꽤 오랜 시간 기억에 남을 여행이 되겠지.







 










 







7일간의 일정:
1박 2일 도쿄 오다이바.
건담/온천 테마파크/레고랜드

(타마 동물원을 계획했었으나)
하루는 집에서 휴식/쇼핑

3박 4일간 일본 중서부지역 신칸센 여행
Toyama(토야마)에서 시작하는 Kurobe Alpine route를 이용해서
Tateyama(해발 약 3,000m)의 정상 가까운 Murodo를 약 2시간 둘러보았고,
Kurobe의 Kurobe George Railway(쿠로베 협곡열차)를 이용, 약 4시간 왕복 관광을 했다.

 c.f. 쿠로베 협곡 열차가 꽤 만족스러웠다.
경치는 물론이거니와, 노천탕이며 야생원숭이며,
볼거리와 놀거리가 풍부해서
가족여행지로 제격이라고 생각된다.
다음번에는 산행을 하러 와보고 싶어지던 지역.

모스크바 Moscow. 5 (Sergiyev-Posad) 모스크바에서 약 70 km 떨어진 작은 세계문화유산 마을


 나의 가장 큰 궁금증은 어떻게 종교적인 상징물들이
공산주의 기간동안 보존될 수 있었는가- 였었다.

그것은 세르기에브-파사드, 매우 종교적인 이 마을에 와서 더욱 증폭될 수 밖에 없었다.

그에 대해 가이드는 좋은 답을 주었는데,
이는 바로 위의 성모와 예수 모자이크화를 설명해주면서였다.
공산주의가 공식화되자 이 마을의 한 가족이 이 모자이크화를 집에 가져가 아무도 모르게 숨겨두었다가
구소련의 몰락과 함께 성당이 어느날 되돌려놓았다는 것이였다.
이는 다분 이 모자이크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각 가정들이 하나 둘 서로 모르게
회손 혹은 매매를 방지하기 위해 집에 몰래 숨겨두었다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공산주의가 이상향이였던 들,
종교 만큼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이였던 모양이다.











알록달록- 다른 디자인드릐 성당이 하나의 큰 성내에 위치하고 있다.
각각의 성당 건물들은  다른 시기에 (수 세기 차이) 그 시대의 유행에 따라 지어지다보니,
서로 통일성보다는 개성을 갖고 있는 셈이다.



대전 생활 1년

14년의 해외생활을 마치고, 2022년 6월부터 대전의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 대전에 도착한 한 달 동안은 마치 한국어를 사용하는 어떤 나라에 온 듯한 기분이였다. 정신없이 지내다보니 벌써 1.5년이 지났다. 아직도 나는 대전이 낯설다. 이 낯설음에 ...